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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주사 작성일 2015-03-06 10:12:02
제목 큰 물음 생기면 모든 것이 ‘화두’ (573)
큰 물음 생기면 모든 것이 ‘화두’
운문 스님은 목주 스님에게 참문(參問)하러 갔다가 목주 스님이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문지방에 다리가 치여 부러졌습니다. 회양 스님은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란 질문에 막혀 8년을 끙끙 앓으며 참구했습니다. 고인들은 이렇게 처절하고도 간절하게 공부했기에 크게 깨쳤는데, 요즘 수행자들은 과연 어떻습니까?”

입춘(立春) 하루 전인 2월 3일 오후, 화계사 대적광전. 수선회(회장 박종환) 일요 참선법회에서 화계사 문화원장 묘봉 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는 요결은 이러저러한 행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절 절(切)’자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이 고양이를 베다)’ 화두를 예로 들며, 공부하는 법을 제시했다. ‘남전참묘’ 공안의 전말은 이렇다.

어느 날 동당과 서당 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로 시비가 벌어지자, 남전 스님이 고양이 새끼를 치켜들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대답이 알맞으면 살리고 대답이 맞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대꾸가 없자 남전 스님이 드디어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밤늦게 조주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전 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조주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

이에 남전 스님이 말하였다. “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을….”

이 공안과 관련, 묘봉 스님은 옛 스님들처럼 저절로 발심이 되어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질문을 던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양이 목숨을 실리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조주 스님이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뜻은 무엇일까? 남전 스님이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이라고 칭찬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렇게 스스로 깊은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스님은 우주와 인생에 대해 깊이 고뇌하여 마음에 큰 물음이 생길 때 화두 아닌 것이 없게 된다고도 했다.

“우리 선종은 매일 독경하는 <천수경> <반야심경>은 물론 예불문, 천도재 법문에도 조사스님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선법문 아닌 구절이 없어요. 예사로이 글자나 탐착하지 말고, 읽고 또 읽어 꿰뚫어서 몸에 와 닿아야 진정한 물음이 생깁니다.”

참으로 발심이 되면 공부 아닌 게 없다는 스님은, 주변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생사(生死)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생사 해탈’하는 일대사에 용맹심을 내야 한다고 했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독경이든 해보지도 않고 수행법을 비방하지 말고 하나라도 직접 체험해 보면서 공부할 것도 주문했다. 스님들의 설법을 마치 TV 보듯이 건성으로 대하지 말고, 법문 하나하나를 자신의 문제로 돌려, 제 마음을 돌아보는 신심이 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선(禪)의 대중화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묘봉 스님의 설법은 수선회 회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심지법문(心地法門)이 되고 있었다. 대전 국은사에 머물며 미국, 대만, 홍콩 등을 대상으로 해외 포교에 주력해 온 스님은 지난해부터 화계사에서 신도들과 20여 외국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선법문을 시작해 호응을 얻고 있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생활을 통해 현대적인 전법모델을 고민해 온 스님은 그동안 문서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천수경>을 본격적으로 선해(禪解)한 <눈 달린 돌사람이 글자 없는 책을 읽는다>와 <육조단경> <선문촬요> <조사선에로의 길> <철학의 파멸> 등의 저서가 그것.

내ㆍ외전에 두루 밝은 스님은 만공 선사로부터 법을 이은 덕산, 혜암 두 큰스님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의 전법제자인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 학생시절에 화계사 조실 덕산(悳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이 불법에 입문한 것은 동국대 3학년 재학시절, 천축산 불영사 황화선원 불교학생수련대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실이던 덕산 스님은 만공 스님의 법제자로서 내선원장(內禪院長ㆍ당시 외선원장은 고봉 선사)을 맡고 있던 선지식이었다. 스님은 덕산 스님으로부터 한 번 법문을 듣고 크게 뉘우친 바 있어 사흘 밤낮을 정진했는데, 그 때의 법문은 달마 대사의 <혈맥론(血脈論)>이었다. 그 길로 덕산 노스님께 귀의하여 곧 입실을 허락 받고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앞 이빨에 털이 났다)’ 화두를 간택 받아 의심하면서 기나긴 참구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스님은 1975년, 5년간의 동국대ㆍ상명대 강사 생활을 과감히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정치 경제 뿐 아니라 사상과 종교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자기 공부와 함께 전법의 방편을 모색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981년까지 대학 강단과 철학모임 등에서 동양 철학의 소개와 좌선법을 안내하는 역할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느낀 전법의 한계가 오히려 자기 공부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1981년, 음력 정월 그믐날 꿈에 덕산 스님이 나타나 10개의 공안을 들고 다그쳐 묻자 부지불식간에 대답은 했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서울 화계사로 전화를 거니 같은 시각에 덕산 스님이 입적했다고 한다. 이 꿈을 계기로 스님은 화두를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고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곧바로 암자와 아카데미를 폐쇄하고 들어앉아 몇 안 되는 외국인 제자들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래도 공부에 진척이 없자 스님은 20년 전, “수덕사에 가서 혜암(惠菴) 노장께 여쭈라”고 한 덕산 스님의 말이 기억나 그 길로 귀국해 수덕사 혜암 스님을 친견했다.

그때가 1984년 정월 보름 해제날 이었다. 혜암 스님으로부터 <육조단경> 법문을 전해 듣다가 전에 덕산 스님이 간택한 화두인 ‘판치생모’를 문득 타파하니 혜암 스님이 ‘옳다’고 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고, 뒤에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렸다.

“산에는 같음과 다름이 없나니, 대 가풍이라 할 것도 없네. 이 문채(文彩) 없는 도장을 묘한 봉우리에 부촉하노라.”

4년 전, 스님은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입니까?”라는 필자의 질문에, “원칙이 있는 수행은 벌써 죽은 공부다”고 답한 적이 있다. 고정관념과 분별심을 철저히 쳐부수는 선(禪)에서 ‘원칙’이란 말이 성립될 리 없다. 스님은 “부처님이 나오신 그 곳은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성인과 범부가 둘이 아니며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고 말하는 터전이므로 심지(心地)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존재의 세계 그대로가 일심법계(一心法界)이니,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또 버릴 것인가.

염불, 독경, 다라니 정진에 대한 스님의 견해 역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심을 찾아 볼 수 없다.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또 버릴 것인가.

염불, 독경, 다라니 정진에 대한 스님의 견해 역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심을 찾아 볼 수 없다.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는 ‘무엇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는가?’를 찾으세요. 다라니를 외울 때도 소리 내는 그 당체, 언어이전의 소리를 체험하세요. 또렷하게 뭘 물어야 하는지를 알면 참선 아닌 게 없어요.”

스님은 운전하거나 일할 때는 철저히 그것과 하나 되라고 말한다. 일과 하나 되어 열중하는 그 순간이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는 정진이란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진할 때나 일하고 쉴 때가 모두 깨어있는 시간이 아닐 도리가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인터뷰 내내 함께 한 젊은 도반이 이렇게 말했다.

“이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려운 이치를 쉽게 말한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 의미 있는 하루였다.